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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울
(뛰어나다, 훌륭하다, 기쁘다) 가嘉 자로
길(吉)자 20개가 더해진(十, 十) 글자이며,
그 뜻은 “좋은 일이 많으면 아름답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샘 천泉 자로
원천 또는 생명의 근원, 여성을 상징하는 글자이며,
“길하고 아름다움이 샘솟는 인생 또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가천(嘉泉)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낸 류승국 박사가
가천길재단 이길여(李吉女)회장에게 지어 준 호(號)이다.
안녕하세요. 이길여입니다.
넓디넓은 인터넷의 바다에서 이곳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간 시공을 뛰어넘어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현듯 내가 겪어 온 삶과 경험,
그리고 시대적 아픔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과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발자취들을 이 곳에 담으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개인적인 자료를 너무 많이 공개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도 던져 보았습니다.
저는 의사와 교육자로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다행히도 한 우물을 파 온 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힐
많은 제자들을 키울 수 있었고, 또 꺼져가던 많은 생명을 구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늘날의 가천길재단은 제 땀과 눈물, 열정이 어려있는 저의 분신입니다.
그러나 이 공간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마련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박애, 봉사, 애국' 이라는 신념아래 외길을 걸어 온 나 자신을 차분히
정리하며 그런 삶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반추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늘 가져온 생각이지만 고백은 서툴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곳이 '희망을 잉태하는 곳' 이라 불리기를 기대합니다.
들과 산의 수많은 식물들은 대지를 뚫고 새순을 돋아 올려 형형색색의 꽃망울을 온누리에 퍼뜨립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잉태된 꽃씨가 또 다시 대지에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굳건하게 또 다른 꽃무리를 이루게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제 삶의 철학인
'박애, 봉사, 애국'이란 가치관이 여러분의 마음과 머리 속에도 깊게 각인되어,
나라와 겨레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 나의 삶과 철학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에 사랑과 봉사의 불씨가 지펴지는 세상 '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입니다.
나는 그런 세상을 기다리며 오늘도 그 날을 꿈꿔 봅니다.
감사합니다.
여의대상 (길의료봉사상)
한국여자의사회가 제정하고 의료법인 길의료재단이 후원하는 상.
전국의 '참 의사'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으며, 2016년 26회째를 맞음.
심청효행상
부모를 공경하고 극진히 모시는 전국의 효녀와, 다문화효부를 선정하여 시상함.
1999년부터 청소년들에게 효(孝)정신을 고취시키고
국민들에게 효(孝)를 선양하기위해 실시하는 효행상으로, 2016년 18회를 맞음.
전북교육대상
이 시대의 '참 스승'을 찾아 시상하고 있음.
가천문화재단과 전북도민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음
한센국제협력후원회
1993년 7월부터 한센국제협력후원회 회장을 맡고 있음.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 한센 환우들의 치료와 재활을 지원해주고 있음.
2001년 12월에는 베트남 빈딘성에 직업훈련원을 건립하여 기증.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경제력이 취약한 심장병 환자들의 무료 진료 사업을 전개하고 있음.
현재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한 운동본부의 이사장을 맡고 있음.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초대총재)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가천모성보호기금 - 이길여 기금
여성권익 신장을 위해 1999년부터 길병원에서 신생아가 1명 태어날 때마다
일정액을 기탁해 여성복지기금으로 사용하고 있음.
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분의 앞길에는
맑은 날도 있고 폭풍우가 닥칠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패기 넘치는 도전정신을 이어 간다면,
그 어떤 풍랑도 여러분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조그만 산부인과 의원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가천길재단을 일군 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여성'이라고들 얘기합니다.
감히 말씀 드린다면 제가 살아온 삶에 대해 성공한 여성의 삶보다는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한 여성의 삶으로 이해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일구고 계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에게,
그리고 위대한 어머니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는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꿔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21세기는 글로벌시대, 지식 정보산업 시대 라고들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혁신을 소홀히 하고
전문지식의 수양을 게을리 한다면 시대발전의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모든 것이 어렵고 두렵게 느껴지더라도 계속 도전해 나가십시오.
자신을 좁은 울타리에 가두지 말고 전세계를 무대로 뛰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젊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새우잠을 자더라도 늘 고래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60이 넘어 화장하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의사가 공부하고
환자보고 그래야지 어디 화장하고 꾸밀 시간이 있냐, 그랬어요.
기자들이 본 의학박사 이길여(2002)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순간순간 행복했어요.
이제 다 나았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수 백 명에게 듣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겠어요.
기자들이 본 의학박사 이길여(2002)
학생들이 모두 내 자식이란 심정으로
대학교육에 최선을 다한다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기자들이 본 의학박사 이길여(2002)
미소는 세계 공통의 친절언어다.
웃을 줄 모르는 간호사는 뽑지 마라.
라운딩할 때 환자에게 먼저 웃어줘라.
가슴에 품은 청진기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으로 키웠고,
의사로서 수많은 새 생명을 받고, 환자를 치료하며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랑 덕분이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병원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가정에 행복과 평안을 주는 곳이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사람이 곧 희망이다. 어찌 보면 의사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인간에 대한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며,
나아가 내 가족과 사회,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씨앗이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나는 마케팅이 뭔지, 경영이 뭔지 잘 모른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병원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우리 병원은 아프고 병든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쉬었다 가는 서민들의 안식처였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환자를 고치고 살리는 건 첨단 의료 기기나 시설,
의사의 실력이나 지식만이 아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이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조국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지혜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사람이 희망이고, 자산이다.
인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2007. 8.
전 정면돌파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가야 해요, 무슨 일이든. 옳은 일, 필요한 일이면
전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기자들이 본 의학박사 이길여(1997)
당신의 꿈에 종지부를 찍지 마세요.
꿈이 있어야 희망이 있고,
실천이 있어야 시련이 있습니다.
가슴에 품은 청진기
바람개비는 바람이 거셀수록 더 빨리 돌잖아요.
전 절대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거예요.
계속 도전할 겁니다. 쓰러질 때까지.
가슴에 품은 청진기
바람이 세면 셀수록 더욱 힘차게 돌아가는
바람개비처럼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굴하지 않는 줄기찬 응전으로 바람을 이겨냈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내 꿈의 도전에 마침표란 없다.
누군가가 내게 그만 쉬라고 할수록 난 맞바람이라는
자극을 받은 바람개비처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진정한 리더란 공부만을 최고라 생각하지 않고, 이웃 사랑과
봉사 정신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도전하는 사람만이 꿈을 이룬다.
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은 나약하고 비겁한 일이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두 다리는 현실을 굳건히 딛고 서 있어도 두 눈은 미래를 향하여
멀리 그리고 넓게 열어두어야 합니다.
1998. 3.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발상을 전환하지 않고는
자신 앞에 가로 놓인 현실의 벽은 돌파할 수 없습니다.
2000. 8.
어려움이야 말로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하는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기 때문입니다.
2001. 3.
과거는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남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과거로 남들과 차별화 된
특별한 미래는 열어갈 수 없습니다.
2001. 3.
명예와 긍지는 계급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에 있으며, 이는 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룩하는 것입니다.
2002. 2.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과 도전정신은 살아 있음의 징표이다.
만일 그 온도가 식어간다면, 생의 ‘파란 불’이 꺼지는 의미다.
2009. 1.
나는 한번도 우물쭈물한 적이 없다.
내가 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물러서거나
회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2012. 2.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가 될 거고, 혼자 살 것이며,
여전히 의료 사업을 할 겁니다.
기자들이 본 의학박사 이길여(1997)
나는 젊은 시절 이미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 ‘나의 일’,
그리고 ‘환자’와 결혼 한 몸이었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환자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야 한다’는
내 의사관은 미국 수련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의 결과였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종합병원을 해야 개인병원보다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던 의사의 길입니다.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2006)
봉사는 나의 기쁨이자 보람 그 자체였다.
내게 타인을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주어진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바람개비(2012)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하면서 나는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도 봉사, 둘째도 봉사, 셋째도 봉사가 그것이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2008)
외지고 낮은 데에 우리 마음의 등불이 숨어 있다.
몸을 던지는 헌신과 희생으로 그 불빛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리도 사랑도 모르고 살다 가는 것과 같다.
2005. 6.
봉사란 손을 비워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봉사하는 기쁨을 모른다면 인생의 절반도 모르는 것이다.
2008. 2.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룬다.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선생님은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고 있나요?"
난 환자에 빠져 있었다.
의사로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남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미래의 리더로 또 미래의 희망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나는 한번도 우물쭈물한 적이 없다.
내가 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물러서거나
회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제 재산을 한 번도 저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인재 양성과 인술을 펼치는 데
재산과 여생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학교와 병원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며,
한 푼도 특정 개인에게 남겨줄 생각은 없어요.
요즘 젊은 후배들은 매사에 진취적이고
열성적이어서 그들을 보면 마음 든든하고
흐뭇합니다. 반면 참을성은 선배들에 비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때가 오게 마련인데 너무 서둘러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입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순간순간
행복했어요. 이제 다 나았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수백명에게 듣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겠어요.
전 정면돌파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가야 해요, 무슨 일이든. 옳은 일,
필요한 일이면 전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학생들이 모두 내 자식이란 심정으로 대학교육에
최선을 다한다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저는 일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과 견줄 수는
없지만 틈틈이 지인들도 만나고 친구도
만납니다. 가끔 골프를 통해 기분전환과
운동효과도 누립니다. 바쁜 일정으로 하루가
빠듯하지만 분주한 가운데 짧게 즐기는
휴식의 멋도 상당하거든요.
행복에는 두 가지 요체가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즐거워하고 몰두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대한 성취감에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자기만의 행복보다는
나누어 가지는 행복이 더 값지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같이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가 될 거고,
혼자 살 것이며, 여전히 의료 사업을 할 겁니다.
지난날에도 내 재산이 얼마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혹시나 아까운 생각이 들까봐
셈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지금 제 심정은 뿌듯합니다. 행복은 한 개인의
소유일 때보다 여러 사람이 나눠 가질 때
더욱 빛이 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뜻이 좋고 자신의 일에 목표를 세워
부단히 노력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건강에 힘쓰면서 죽을 각오로
한다면 안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최고가 되고 안 되고는 각자의 생각과
노력 여하에 달렸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지요.
역사라는 것은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선과
같은 거지. 개개의 사람은 그 선을 잇는
하나하나의 점이란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저마다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야.
별생각 없이 헛되게 살기보다는 자신의 점이 유난히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단다.
당시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화려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 머리 속에선 고국에 돌아가
환자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博愛(박애)
그늘 진 곳, 소외된 삶들을 보살핍니다.
'보증금 없는 병원’, ‘새생명 찾아주기 운동’ 해외심장병 어린이 무료수술,
의료 취약지 병원운영 등으로 어려운 환경의 위태로운 생명을 사랑으로 돌봅니다.
낮은 데, 외딴 삶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길병원 정신의 뿌리입니다.
“소외된 삶들을 보살핍니다.”
奉仕(봉사)
손을 비워서 마음을 채우면 행복합니다.
봉사와 나눔이야말로 선진 사회의 ‘소금’입니다.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의 씩씩한 기상, ‘심청효행대상’에
빛나는 고결한 효성은 세상을 밝히는 봉사의 등불입니다.
가천문화재단 가천박물관이 베푸는 문화 나눔이 훈훈하고 격조 높은 세상을 가꿉니다.
“영원한 봉사의 신념”
愛國(애국)
인재 양성이 나라사랑의 시작이자 끝 입니다.
사람이 바로 그 공동체의 미래입니다.
글로벌 리더를 배출하고, 의료인재를 가꾸어내는 꿈이
가천대학교의 글로벌, 메디컬 두 캠퍼스에 담겨 있습니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가천뇌과학연구원’,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은
21세기 초일류 코리아의 디딤돌 입니다.
“인재 양성, 나라사랑의 시작이자 끝”
빈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하며,
본격적으로 세상을 향해 인술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환자가 너무 많이 밀려들어 하루 4시간밖에 못 자고 의료기기와 의약품이 늘 부족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에게 봉사할 기회와 능력이 주어진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를 천직으로 여긴 것이지요.
‘이길여 산부인과’는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자 했던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의 공익경영이 초석을 다진 곳입니다.
‘이길여 산부인과’가 있 었던 자리 위에,
당시 모습을 생생히 재현해 둔 이 곳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은
작은 시골소녀의 꿈이, 의사 이길여의 열정이, 가천길재단의 비전이
시간을 초월해 한 길로 흐르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 내 인생의 꿈은 ‘외진 데’,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
- 의사 이 길 여
1층
1960/70년대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가난하고 어려운
서민들에게 24시간 병원 문을 활짝 열어둔 ‘이길여 산부인과’의 1층 모습을
생생히 재현한 전시공간입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90번길 19-4 | 032-770-1355
09:00 ~ 17:00 무료관람
보증금 없는 병원
그 시절, 병원 문턱은 너무 높았다. 미리 보증금을 내지 않으면 진료도 입원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고, 안타깝게 희생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든 병원에 와서 치료받고 수술하고 입원할 수 있어야 한다.
돈보다 목숨 아닌가?’ 간판으로 써 붙인 ‘보증금 없는 병원’ 은 그렇게 탄생했다.
가슴에 품은 청진기
환자들이 안방처럼, 호텔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까지도 의사의 몫이다! 그래서 청진기는 단순히 흔한 의료기구가 아니었다.
환자가 진료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와 닿는 감촉, 즉 첫 느낌은 청진기가 전달한다. 너무 차가워서
가뜩이나 긴장된 환자들을 더 움츠러들게 한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때부터 청진기를 늘 자신의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덥히고, 진료할 때마다 꺼내 사용했다.
보석 반지 대신 첨단의료기를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최초로 초음파기기 네 대가 수입되었을 때에
그 중 한 대를 과감히 들여왔다. 당시 4000만 원(2015년 화폐가치 기준 약 7억 원)에 상당하는
고가의 장비였지만 사들였다. 태아의 건강 상태를 완벽히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태아의 발육상태를 생생히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층
환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그때 그 시절.
당시 ‘이길여 산부인과’의 수술실, 분만실, 입원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공간입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90번길 19-4 | 032-770-1355
매일 09:00 ~ 17:00 무료관람
외딴 섬 밝히는 仁術의 등불
그 영종도의 산모, 그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1950년대 후반이었다.
“이길여 선생님, 당장 영종도로 함께 가주세요. 제발 저희 집사람 좀 살려주세요!”
한 남자가 병원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땀과 눈물로 흠뻑 젖은 그 남자의 모습을 보니
산모의 위급한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왕진 가방을 챙겨 나섰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영종도에, 거기에서 또 산 넘고 물 건너 논두렁 길을 한나절 넘게 내달렸다.
그러나, 산모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속절없이 숨을 거두는
무의촌 지역 주민의 실상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 사각(死角)지대의 환자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침내 통통배 타고 들어가서 무료 순회 진료를 시작했다.
미역국에 담긴 ‘고객감동’의 정신
병원에서는 언제나 한 솥 가득 미역국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길여 산부인과의 미역국은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퇴원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냄비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환자도 가족들도 그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미역국일
뿐이었다. 무엇이 그 보통 미역국을 사람들을 감동시킨 명물로 소문나게 한 것일까?
한결같이 환자만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한 마음으로 미역국을 끊여냈기 때문일 것이다.
환자와 함께 울고 웃다
병원이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닌 환자의 가정에 행복과 평안, 웃음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를 진료할 때면 몸으로 직접 안아서 일으켰다. 위로하는 뜻에서, 그리고 친밀감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그러나 ‘안아 일으키기’가 너무도 정확한 진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자가 아프면 나도 따라 아팠고, 환자가 슬프면 나도 같이 슬펐으며, 환자가 기쁘면 나도 덩달아 기뻤다.
나에게 병원은 이렇듯 환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소(小)우주였다’
3층
인터렉티브 영상, 포토존 등 멀티미디어를 통해,
과거 ‘이길여 산부인과’의 봉사인술을 가천길재단의 비전으로 확장해 볼 수 있는
복합체험 공간입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90번길 19-4 | 032-770-1355
매일 09:00 ~ 17:00 무료관람
의사 이길여, 세상을 청진하다
돌이켜 보건대 바람개비는 내 삶의 표상이었습니다. 어릴 적 바람개비 놀이를 곧잘 했습니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할수록, 바람은 바람개비를 더욱 힘차게 돌리곤 했습니다.
혹여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나는 바람을 일으키려고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의 삶의 자세는 이런 어린 시절 만들어진 듯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외롭고 험한 길이었지만 보람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박애∙봉사∙애국의 일념으로 따뜻한 진료에 매진하던 작은 병원은 이제 의료∙교육∙문화∙언론을 아우르는
종합공익재단으로 거듭났습니다.
내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내가 초석을 놓은 가천대 길병원이
세계적인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고, 가천대학교가 글로벌 명문이 될 때까지 나는 계속 달려나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라난 인재들이 드넓은 세상에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이 이웃과 세상을 위해 불 환히 밝히면, 나의 꿈은 완성될 것입니다.
맥박이 멈출 때까지 내 모든 것을 가천길재단에 바칠 생각입니다.
가천길재단의 내 삶의 전부이며,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내 꿈의 터전입니다.
보증금 없는 병원
그 시절, 병원 문턱은 너무 높았다. 미리 보증금을 내지 않으면 진료도 입원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고, 안타깝게 희생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든 병원에 와서 치료받고 수술하고 입원할 수 있어야 한다.
돈보다 목숨 아닌가?’ 간판으로 써 붙인 ‘보증금 없는 병원’ 은 그렇게 탄생했다.
가슴에 품은 청진기
환자들이 안방처럼, 호텔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까지도 의사의 몫이다! 그래서 청진기는 단순히 흔한 의료기구가 아니었다.
환자가 진료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와 닿는 감촉, 즉 첫 느낌은 청진기가 전달한다. 너무 차가워서
가뜩이나 긴장된 환자들을 더 움츠러들게 한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때부터 청진기를 늘 자신의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덥히고, 진료할 때마다 꺼내 사용했다.
보석 반지 대신 첨단의료기를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최초로 초음파기기 네 대가 수입되었을 때에
그 중 한 대를 과감히 들여왔다. 당시 4000만 원(2015년 화폐가치 기준 약 7억 원)에 상당하는
고가의 장비였지만 사들였다. 태아의 건강 상태를 완벽히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태아의 발육상태를 생생히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